H였다.
그녀와 언제 부터 친해졌는지는 모른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무렵의 아이들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의 끊김이 많고 바뀌기 쉬우며
아직 제대로 사람이지 않은 여덟 또는 아홉쯤.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H의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H가 문득 놀러오지 않겠느냐며 물었던 것 같다.
허락받지 않고 다른 이의 집에 놀러간 것이 처음이었다.
H가 허락받지 않고 다른 이를 집에 불러온 것이 몇번쯤 되는지는 모르겠다.
많았을 것 같다.
그러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H의 집은
제법 운치가 있는 넓은 집이었다.
마당이 넓고 여유가 있으며
현대식도 아니고 고전양식도 아닌
애매한 양식의 애매한 집이었다.
하지만 편안했다.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무엇을 말하며 놀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재미있었던 것 같다.
무엇을 대접받았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맛있었던 것 같았다.
작고 귀여운 쟁반에 있던 뭔가의 먹거리와 달콤한 음료를 마신 것을 기억한다.
설령 맛이 없는 것이었더라도 달콤하고 맛있었을 테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이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것이다.
H가 나의 첫 이성의 친구는 아니었다.
8세의 아이에게 연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고.
그저 가까이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맞다.
H는 귀여웠다.
좋아했던 것이 맞을 것이다.
사랑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의 내 나이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이성의 친구의 집에 놀러간 것도 그것이 처음이었다.
봄철의 따뜻함과 다르게
매우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되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어스름결이 떨어지면서
비도 함께 쏟아지기 시작했고
집까지 비를 맞고 가야 하는 나를
걱정스러운 큰 눈으로 배웅을 하는
그녀를 자꾸 자꾸 돌아보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집까지
느린듯 빠른듯 뛸듯 말듯 하며 달려 왔다.
좀 더 머무르기에는
아이에게는 늦은 시각이었고
싸리비에 옷이 젖어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웠던 것이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을 이긴것이다.
아이였으니까.
그리고는 한동안 아무일이 없었다.
H와 나는 친했던것 같다.
그리고 싸리비는 비가 아닌 우박이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아무일이 없었다.
단지 H가 나를 멀리 하기 시작했으며
나를 보며 귀여운 얼굴을 찌뿌리며 화를 내는 것이 잦아진 것 외에는.
단지 가까이 있는 것으로도 불쾌해 하는 그런것들.
어수룩하고 늦된 내가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체구 때문에 또래 애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한심해 보였을 수도 있겠다.
나는 몰랐지만 내 몸에서 냄새라도 났던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나의 잘못일 것이다.
H가 내게 그렇게 대한 것은
그 무렵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서
H의 집에서 멀지 않은 부유한 이들의 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의 지역으로 이사한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H는 아직 아이여서 그런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이 맞을 것이다.
H의 부모님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가난해진 집의 아이와는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하셨을 리가
없는 분들이었을것이 틀림없이 맞을 것이다.
그런 눈치나 분위기의 흐름을 간파하는 능력은
그 또래의 아이에게는 없다.
나는 H가 교활했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아이였고 그녀도 아이였고.
그 또래의 아이들은 그런것을 생각할 수 있을리가 없을 것이다.
그 무렵에 나는
사람을 하나씩 더 알고 지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H의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세가 더욱 기울어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오래전 소풍날에 찍은 사진에도
유독 그녀만은 있지 않다.
나는 단지
H의 귀여운 얼굴과 찌푸린 얼굴을 교차로 바뀌는 기억과
그녀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녀를 미워하는지를 묻는다면
글쎄 너무도 나이가 많아져
그 어린 나이의 일로 미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아이들이었을 뿐이다.
다만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리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친구가 필요한 것이 아닌
최소한의 부유함을 갖춘 친구가 필요했을 정도로
어른스럽게 교활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싶다.
싸락눈이 내리면
그 아이가 생각난다.
내가 싸락눈의 운치를 즐기면서도
항상 센티멘탈 해지는 것은
싸락눈 속에서
그 아이의 귀여운 얼굴을 함께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성 친구의 집에 놀러간 것은
그 싸락눈이 내리던 날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