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글로리가 나팔꽃과 완전하게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모닝글로리”는 필기도구 상표 밖에는 연상되지 않아서.
어쨌든 내게는 “모닝글로리”라는 이름이 꽃으로는 연상이 잘 되지 않는다.
나팔꽃의 외국식 이름이 왜 모닝글로리인지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이다.
어린 시절 시골집에서 머물 때
늘상 그렇기는 하지만 일찍 아침밥을 먹고
해 뜰 때 집 앞을 나서면
담 옆에 덩쿨이 묶여 있고 그 위에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는 꽃이 있는데
그 꽃이 지금 얘기하려는 나팔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기도 하고.
아침에 집앞을 나서서 그대로 하루를 쭉 노닐다가
해가 기울 때쯤 집 앞에 와보면
그 때는 이미 시들어 있는 끈기 없는 꽃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금새 시들어 버리니 “아침의 영광”이 맞다.
그 때 그곳에 있던 나팔꽃의 색은
이제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쁜 연청보라였던것 같다.
연청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고.
다소 잡스럽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청색 그라디에이션이 있는.
꽤 괜찮은 색이다.
나팔꽃이란게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덩굴이 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꽃들은 대략 십 수 송이가 담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사실 시골집에는 대문 같은 것은 없는 경우가 많다.
거리적 거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이라고 할 만한 것도 대부분 대문이 사라지면서 사라져 버린다.
기껏 짐승들때문에 쳐 놓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없어진 뒤에는 더더욱 그러해서
그냥 근처에 덩굴을 올릴 만한 곳에 기대어 나팔꽃이 겨우 피어 있는 것이다.
아침에는 항상 예뻤던 꽃이
저녁 즈음에는 반드시 철저하게 시들어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기억해 뒀다 점심 때쯤 부러 확인하러 간 적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는 시간 맞춰서 한꺼번에 시드는게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상상의 시작이었다.
점심 때쯤 아침 때의 그 완전한 모습을 기대하고 갔었지만
시들어가는 도중의 모양만 봤었다.
한꺼번에 시들어버리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다.
결국 가장 예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침에 이슬을 머금고 햇빛을 받던 그 때 뿐이었다.
그래서 아침에만 보는 꽃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내 관심밖에서 멀어졌다.
나는 그때 시들어 가는 것을 본적은 많지만
꽃이 피어나는 도중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새벽녂에 일어나 무심결에 보고 알게 된 것이지만
나팔꽃은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피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 몰랐을 뿐
놀랍게도
밤에 피는 꽃인 것이다.
어쨌든 좋았다.
그리고 지금도 좋다.
저녁이 되면
몽땅 시들어버려도
그리 서글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음날 아침에는 또 활짝 피어 있기 때문이다.
어제 피었던 그 아이가
오늘 피어 있는 이 아이와 같은 아이인지는 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워낙 많이 피어 있기도 하고 그 자리에 도로 피어 있는 것을 보면
같은 꽃이기도 하고 아닌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같은 아이가 다시 펴났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동화를 보는 아이처럼 간직하려는 억지를 가지고 있다.
그 뒤로는 다시 내 마음속에서 지워졌다.
남 모르는 부지런함 뒤에 보여지는
아침의 영광 따위는.
나팔꽃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반딧불을 보지 못한 때와 비슷한 시기인 것 같다.
그 때는 다들
그 반짝이는 벌레를 “반딧불이”라고 하지 않고 “반딧불” 이라고 불렀다.
나팔꽃과 반딧불
둘 다 복잡한 것과 독한 것과 시끄러운 것 – 그러니까 우리가 공해라고 말하는 –
이런 것들을 견디지 못하는 것들인지
작심이나 한 듯이 언젠가 부터 한꺼번에 보이지 않았다.
시골집에 신작로가 들어오고 웬갖 신식 물건들이 들어오면서 즈음이었던 것 같다.
최근 십수년간 나팔꽃을 본 기억이 없다.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면
꽃집에서 일부러라도 찾아 볼 듯 한데 말이다.
꽃 선물을 나팔꽃은 하지 않으니
찾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기억속에는 아직 남겨두고
가끔은 예쁜 빛깔의 색을 보고
이슬 머금은 꽃들을 볼 때면
그 때의 것을 기억해 보긴한다.
내가 기억하는 나만의 생각속에서의 나팔꽃이란.
내가 잠들었 있는 밤부터 부지런히 남들 모르게 움직여서
아침에 반짝이게 피어난 모습을 보이고
저녁이 되면 시들어가면서도
나를 보고
“나 제법 이뻤어?”
하고 물어보는 그런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