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농부들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그는 특별히 더 평생 동안 매우 부지런했다고 전해진다.
젊은 시절 부터 여든을 넘긴 후 까지도
매일 새벽4시 이전에 눈을 뜨고 일어났고
항상 고물라디오를 켜고 뉴스를 듣는다.
노란고무줄로 겉을 칭칭 동여맨 수십년은 된 듯한 라디오는
그 시절의 다른 전자제품들이 다 그렇듯이
가끔 때리지 않으면 소리를 내지 않았고
수십번을 때려서 겨우 나는 소리도
잡음이 많이 섞여들여 알아 듣기 힘들때가 많았고 귀에도 많이 거슬렀다.
내가 가끔 그의 곁에서 잠들었다가 새벽에 쉽게 깨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라디오를 듣다 어스름결에 동이트고 밖이 밝아지기 시작하면
그는 늘 왕복해서 서너 시간이 족히 걸리는 선산까지 조용히 혼자 다녀왔다.
그가 왜 매일 한결같이 선산까지 새벽에 다녀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습관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매일 그곳에가서 조상을 보살피는 의무를 다하도록 지시받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는 제법 유명한 명문양반가의 큰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는데
그는 바뀐 시대 탓에 선비는 되지 못하고 농부가 되었다.
어차피 그 맘때쯤은 선비, 양반 이런 것들이 사라진지 제법 시간이 되었으니까
그의 집이 있는 곳은 그 일대의 유명한 집성촌이었다.
그의 마을 옆에 그의 형에 살았었고 근처에 그의 친척과 형제들이 살았거나 살고 있었다.
원래 제법 큰 집안이고 집성촌인 까닭에 그의 집안의 규모는 상당했다.
큰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의 집 앞에는 커다란 옜날식 서당이 있으며 그 또한 그의 집안의 소유이다.
그 서당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현재 문화재 중 하나이며
나중에 그의 집안의 제사을 위한 제각으로 바꾸었다.
그가 한 때 집안의 소유물인 서당을 개인의 자격으로 대신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가 그 서당을 다녔는지 심지어 문맹인지 아닌지는 나는 알 수 없다.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을 좀처럼 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몇글자 글은 깨우쳤을 것이다.
하지만 달필에 문장가는 분명 아니었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에 있었다.
시내가 마을앞에 흐르고 제법 높은 뒷산이 있었고
마을 앞 시내부터 산까지의 완만한 구릉의 중턱쯤에 위치한 그의 집은
산에서 부터 시내 앞까지 내려온 작은 산구릉을 등에 지고
산에서 부터 시내 앞까지 내려오는 작은 개울을 앞에 둔 기와집이었다.
배산임수 안에 다시 배산임수인 곳이었다.
그의 집은 양반가의 후손들이 다 그렇듯이
전형적인 한국의 기와집이었고
으리으리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고 지은지 오래되어 매우 낡았지만
깨진 기왓장 하나 없이 잘 관리되어 있었고
처음 만들었을 때는 틀을 잘 잡은 매우 훌륭한 집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집이었다.
그의 집이 상당히 외진 촌구석에 있는 이유는
그의 조상이 낙향반 귀향반으로 정착한 곳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검소했다.
술도 비롯한 사소한 군것질도 잘 하지 않았고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물건을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했다.
명절날이면 다른이들이 하는 윷놀이도 하지 않았다.
가끔 자식들이 모여 화투패라도 돌리고 있는 것을 보면
나무라지는 않았지만 씁쓸하고 굳은 표정을 짓곤 해서
자식들은 명절날에 놀이라도 하려면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가 즐겼던 것은 오직 수십년을 폈던 청자 담배였고
말년에 폐암에 걸려 담배를 끊었지만 결국 그는 그것때문에 죽었다.
그가 원래 부자였는지 부지런해서 부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읍내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 중 한명이었으며
또한 유명한 구두쇠였지만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이 개화될 때도
자신의 재산을 기부해 마을에 전기를 들여 놓았다고 했다.
텔레비젼을 사서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여 같이 보게 해주었다.
검소했지만 큰 돈을 쓰는데 인색하지 않아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은 아닐지라도 경외와 존중의 대상이었다.
왜그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마을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많이 봤다.
나는 그 이유를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가 그의 집에 머물때 나는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물을 갈아 먹어서 생기는 피부의 심한 가려움이었는데
밤새 누군가가 긁어 주지 못하면 잠들지 못했다.
나를 잠재우기 위해서 내 등을 긁어주는 사람은
그가 아니면 그의 아내인 나의 할머니였다.
또 하나의 문제는 마을 아이들과 놀게 해주긴 했지만
많이 친해지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집이 양반이었고 마을의 다른 집은 평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에 이미 조선시대에 있었던 신분의 차이는 없어졌지만
그의 촌구석 마을에는 아직도 그런 관습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일대에서 땅과 산을 가장 많이 소유했고
계속 줄어가긴 했지만 많은 소작농과 머슴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그의 자식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법이 없고 대체로 엄하게 대하였는데
그래도 그중에 나에게는 가장 잘 대해주는 편이었다.
그것은 그의 자손들 중 그를 가장 많이 닮은 것이 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에게 그것이 싫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갑자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이를 들어가면서
내가 어쩐지 자꾸 그가 살았던 것과
비슷하게 살아가게 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따라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와 아주 같지는 않아도
지극히 평범한 듯 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삶을
그냥 내 나름대로의 삶을 꾸준히 이어가며 잘 마칠 수 있을지
나는 늘 생각하고 고민한다.
그가 그런 삶을 의도했는지 그저 흐르는대로 따라서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그는 오랫동안 함께 했었지만
나와 그의 대화는 평생에 걸쳐 몇 번 있지 않았다.
어쨌든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을 지켜 나가는 것도
지금의 나는 조금 힘들다.
단지 나와 가장 비슷했었던 그의 생각을 하면서
내가 어찌 살아가게 될지를 미리 가늠질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