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사는 것의 갈림이 흔한 곳에서도
간직하거나 지켜야 할 것은 있나보다.
본능으로 인해 자손보존을 위한 것이던
아름답고 고결한 자신만의 사상과 철학이던
간직해야 할 것을 위한 노력의 충실함은 어느것과 빗댈것은 아니다.
왜 그렇게 어렵게 사느냐고 묻지 않기로 했었다.
어느덧 나도 그랬던 것 같아서.
그리고 나도 그런 물음에는 답할 자신이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그런 것을 물을 수 있겠나.
사실 그것이 선택한 것인지 아니었는지도 잘 모르겠는 것을.
그런 것은 원래 이유가 없다.
저 사막의 저 두 마리 코끼리.
저 들 중 누가 먼저 죽을까?
약한 쪽? 늙은 쪽?
병든 쪽.
누구든 먼저 죽거나
아니면 같이 죽거나.
영원히 죽지 않고 행복할 리는 없다.
그것보다도
저렇게 물을 찾아 사막을 헤메이는 것은
그들이 선택한 삶일까?
그렇게 살아가고자 태어나기를 갈망한 것일까?
…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그런것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늘 그렇듯 그들 스스로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러하다.면?
그들에게도
나와
우리들의 문제는
우리들 스스로의 문제여서
그들에게는 관심밖일 수 있다.
또는 존재밖이던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공평하다.
물론 꼭 공평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존재밖의 취급일 수도 있다.
당위성도 없고
강제성도 없는 것이라.
그래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존재밖이라서 마음이 아플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닐터이고
어쨌든
그렇게 된다면 하는.
그런 생각때문에
가끔은 허전해진다.
이것도 나의 나를 위한 이기심의 일종일 것이다.
존재밖으로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저 둘은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에게는 다른 하나가 존재의 이유가 분명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고마웠을 것이다.
함께 있었음이.
그래서
하나가 죽는다면
다른 하나는 울어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