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5원.
이었고
내 나이는
5살.
이었을 것이다.
설탕 묻은 눈깔사탕은 ‘원래’ 5원에 2개다.
설탕 안 묻은 사탕은 ‘원래’ 없다.
색깔은 빨주노초파남보 휘황찬란
로 아름답게 기억속에 꾸며두고 싶지만
지나간 기억이란 것이 추억이되면 오래된 텔레비전처럼 흑백이 되버린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흑백이 아닌 칼라 텔레비전이라고 해도.
솔직히 말하면
색깔은 노랑, 빨강, 초록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먹음직 스러운 빛깔은 아닐지라도 아름다운 빛깔이었었기를 바랄뿐이다.
‘이유’라는 것이 있다.
내가 5원을 보면 사탕을 생각해 내는.
삼색의 신호등을 보면 왜그런지 이제는 이유도 생각나지 않지만
불연듯 거북이배를 기억해 내는 것과 같은.
그런 이유같지 않은 이유말이다.
연결되지 않아도 될 추억, 기억, 현실 그런 느슨한 연결고리 같은 것 말이다.
젋은 아주머니를 보면 사탕을 기억하는 것도 같은. 이유
깡통을 보고 신호등을 기억해 내는 것도 같은. 이유
아기 업는 포대기를 보고 사탕을 기억하는 것도 같은. 이유
그래서
교차로를 지날 때 문득 젋은 아주머니가 아기를 업고 깡통에 든 사탕을 팔고 있지 않을까?
가끔 두리번 거리는 것.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도 전부다 같은 이유로 인해서 이다.
두리번 거림은
5살, 15살, 25살, 35살 그런식으로의 10년씩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내가 기억하는 것을 지키려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사탕을 좋아해서 사먹으려고 그랬던 것.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탕담긴 깡통이. 애기포대기가. 그 따위 것들이 정겹다고 생각해서도 아니고.
그저 담배연기를 코로 내뱉는 것과 같은
무심한 습관이다.
.
습관처럼 사먹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5원에 2개짜리 눈깔사탕이란 것.
먹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2개를 사서
먼저 입에 넣어 먹던 1개마저도
묻어 있던 설탕이 녹아 없어지면 무미한 맛으로 인해 뱉어야 했고
손에 들고 있던 나머지 1개는
먹지 않고 그냥 어디론가 내 손에서 나의 무관심으로 인해 분실되어 사라진다.
지독하게도 달고 딱딱하고. 결국은 쓴맛이 나고.
수없는 경험으로 어차피 먹지 않아도 맛이 없을 것을 안다.
하지만 맛없어도 습관처럼 사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5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사탕2개밖에 없고
5원짜리 물건을 파는 사람도 한 명 뿐이었다.
그 물건은 상점에서는 팔아서 안되는 물건인지.
어째서 길가에 서서 아기를 엎고 팔아야 했는지.
궁금하다는 것에 대해서 몰랐다.
어째서 사먹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을까?
엄마는 늘 그 맛없는 것을 자꾸 사먹으라고 했을까?
그 아주머니 업고 있는 아기도 사탕을 먹고 자라는 것일까?
그 깡통은 어디서 온 것일까? 누가 준 것일까?
그런 것.
내 알 바 아니었다. 알기에는 너무 어렸으니까.
노랫말에 나오는 냉장고의 고등어처럼
엄마는 사탕을 내게 사주려고 하셨나 보다. 그 맛없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맛없는 것을 계속 아무말 없이 사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그랬을까?
매직캔디라서 사탕이 사탕을 낳아서 계속 불어나니
팔아 없애려고 했던 것인지.
그 물건을 팔아야만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것인지.
그저 어디선가 얻어온 사탕으로 부업을 하는 것인지.
그것은 추억속의 다섯살. 나는 모르는 것이고.
이제와서 알아차렸었도 무효다.
그 나이의 5살에 5원씩 계속 더해서 결국 100살이 된다해도
인정할 수 없다. 모두 무효다.
그렇게 맛없는 사탕에
짙은 여운이 남아 없어지지 않는 어두운 기억을
몰래 끼워 파는 것.
무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