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아가씨 A girl in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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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언제였을까?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대략 언제쯤인지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으로부터 칠년 아니면 팔년전쯤.

갑자기 맡게 된 일로 연일 바쁘게 일을 하던 일상이었다.
또다시 늦은 시간까지 모두가 일을 하던 때였다.
닭장 같은 일터의 건물에서 함께 나온 우리는
뜻하지 않게 제법 눈이 많이와서 길에 수북이 하얀 눈이 쌓이는 것을 알았다.
약간의 피곤함과 번잡스러운 교통을 뚫고 집으로 갈 생각에 잠시 망설였다.

“버스 타세요?” 라는 그녀의 말과
“네” 라는 나의 짧은 대답을 시작으로
회사의 입구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만약 우리가 같이 나오지 않았고
우리 중 하나가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I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I를 알게 된 것은 뜻밖의 사건도 없었고 운명적인 어떤것도 없었다.
그저 직장에 새로 합류한 경력직 여사원으로 시작했을 뿐이다.
미인이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눈이 온 날은 I가 직장에 들어온지 두세달 정도 지난 뒤였을 것이다.
늦은 밤에 함께 나오게 된 것은 급히 진행하는 일로 그녀와 내가 바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와 성격이 달랐다.
붙임성이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비교적 친근하고 싹싹하게 대하는 좋은 성격이었다.
나에게는 유난히 친절했다.
물론 그 “나에게는 유난히”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숙한 사람들의 흔한 착각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미숙한 사람들의 고쳐지지 않는 미숙함이다.

그녀의 꾸밈은 많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이었다.
꾸밈은 또래의 여자들에 비해 그리 과하지는 않지만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걷는 자태를 보면 탄력있고 건강해 보였다.
얼굴도 몸매도 미인이었다.
그래서 내가 I가 미인이어서 기억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보면
I가 미인이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

그래 그냥 무척 예뻤다고 하자.
그게 더 솔직한 것일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싹싹하고 차분했다.
사회생활도 잘하는 그런 적극적인 젋은의 삷을 살고 있었다.

왜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과
성공한 커리어우먼을 바라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I의 마음을 잘 알지는 못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묘한 마음의 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느끼고 있었으니까.

I와 내가 긴 시간 동안 회의실에서 얘기를 나눈적이 있거나
찻집에서 빈번하게 잡담을 즐겼거나
함께 같이 붙어서 하는 일이 잦았던 아니었다.
드문드문 만나서 잠깐씩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마는
그런 흔한 직장내에서의 관계였다.

하지만 순진한 남자들은 대부분 하는 착각이겠지만
I가 내게 호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줄 만큼 우리는 제법 친근했다고 기억한다.
나를 마치 수년을 함께 일한 사이처럼 그렇게 친근하 대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역시 미숙한 남자들이 하는 흔한 착각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착각은 내 자유다.

그해 겨울에
그 눈이 내리는 날 그 눈이 수북히 쌓이 거리를 함께 지나며
묘한 거리감의 사이가 좁혀질 만큼의 많은 잡다한 얘기를 하며
그녀의 입김을 가까운 곳에서 느꼈다.

정류장에 도착할때까지 이런저런 잡스런 얘기를 나눴고
정류장에서도 버스가 올 때까지 한참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묘한 거리.
낯선이를 경계하는 듯한 뚜렷한 거리보다는 가깝고 연인사이 보다는 먼 그 거리.
그래도 이전 보다는 그 거리가 많이 가까워진 것을 느꼈지만.
착각과 실제의 구분이 모호한 그 느낌은 언제나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버스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내 머리에 있었다.
심장의 작은 두근 거림은 현실을 부정하려고 한다.

사랑인지 그게 아닌 동물적인 본능인지 모를 것들

지금도 나는 가끔

술자리에 고운 자태로 앉아서 조분조분 말하는 I의 차분하고 시잌한 모습과
과하지 않게 가슴이 패인 세련되면서도 설레임을 불러오는 그 패션을 기억한다.

그런 생각은 그저 그녀가 매우 매력적인 미녀라는 것에도 있었고
I의 마음에서 나를 향한 애정 비슷한 것이
한푼어치도 없다는 것을 어림으로 알고 있었지만
혹여라도 그랬으면 하는 나의 사춘기때와 같은
설레임이 심어놓은 환상일 것이다.

서로 각자의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타고 헤어진
눈이 많이 내렸던 그날 이후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 스치기도 어려울 만큼 바쁜 시기를 보냈다.
내가 더 적극적이고 숫기가 있었더라면
그녀에게 날마다 찾아갈 구실을 찾아 말이라도 걸었을지 모르겠지만.

친절하고 상냥한 I와 다시 얘기하게 된 것은 몇달 후였다.
회사의 사정이 안 좋아져 I가 직장을 옮기게 된 것이다.
아쉽고 섭섭해 하는 얼굴에 기운없는 목소리였다.
직장을 잃어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였는지
처음보는 풀죽은 모습이었다.

I는 직장을 잃는 것을 조금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정이라는 것이 있겠지’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으니까.

사람은 말하지 않더라도 행동에는 삶이 비춰져 보인다.
나는 그렇게 비춰진 것을 잘 보는 편이다.
I는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옮기는 직장이 더 좋은 곳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가 모든이에게 싹싹하고 친전하게 대해온 것.
제법 괜찮은 향수와 조금은 가슴이 패인 과하지 않은
섹시한 옷을 즐겨 입었던 것은
이럴 때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원래 I의 모습이었을까?

며칠 후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그날이 I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기를 찾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작별인사를 했다.

이런 헤어짐 후에 다시 만나기는 너무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제라도 그녀와 연락을 하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은 아니겠지만
인연이란것중에는 그런 것도 있다.
가끔 생각할 수록 가슴이 더 먹먹해지긴 하지만
서로 더 닿지 못하는 것 말이다.

계절이 여러 번 다시 바뀌어서 겨울이 다시오고
나란히 줄지어 선 가로수의 머리위에
보도블럭에
눈이 하얗게 쌓이고
그리고 그런 사이도 추워보이는 옷차림으로
제법 굴곡이 있는 몸매의 미인이
시잌하고 유혹하는 듯 하지만 천박하지 않은
매력적인 자태로 걷는 것을 보면
함께 눈길을 걷던 예쁜 I의 모습이 생각난다.
냉랭하고 쌀쌀한 공기에서 묻어나오는
가슴 두근거리는 설레임의 기억과
그때의 향기와 함께.

”그녀는 정말 나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었을까?”
미숙한 사람들은 또 이래서 잠깐의 인연도 잊어버리지를 못하나 보다.

눈이 녹기전에 이런 길을 더 천천히 몇 번을 더 걸어야 겠다고 마음 먹는다.
I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그 소중한 기억이 남아 있으니까.

Author: deja-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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